내고장 역사교실 제2부 ⑬ 살아있는 권력을 비판한 백인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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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권력을 비판한 백인걸
●문화재명: 용주서원(파주 향토 유적 1호)
월롱면사무소에서 휴암로를 따라 LG디스플레이 방향으로 가다가 보면 월롱초등학교로 들어가는 길이 있다.
월롱산을 등반하는 사람들이 이용하는 길이다. 이 길을 따라 들어가면 산을 등진 언더에 용주서원이 있다. 용주서원이 들어서 있는 그 일대가 조선 시대에는 ‘휴암(休巖)’, 즉 ‘휴식을 취하는 바위’라고 불린 곳이다.
이곳의 지명을 따서 백인걸은 자신의 호를 ‘휴암(休菴)’, 즉 ‘휴식을 취하는 암자’라 했다. 백인걸의 삶을 들여다보자.
조광조를 스승으로 모시다
백인걸은 일찍이 성리학 연구에 심취하였다. 특히나 당대의 최고 학자로 일컬어진 조광조를 흠모하였다.
‘정암(조광조) 선생의 옆집으로 이사를 가야겠어.’
조광조를 존경하여 옆집에 살면서 가르침을 받는 대신, 벼슬에는 크게 뜻을 두지 않았다. 그런데 유교적 혁신 정치를 이끌던 조광조가 기득권 세력의 반발(기묘사화)로 사사되고 많았다. 기묘사화로 많은 성리학자들이 제거되었다. 백인걸은 조광조가 죽임을 당하자 세상을 한탄하며 금강산에 들어가 은거했다.
벼슬길에 나아가다
그러나 어머니가 점점 연로해지자 봉양을 하기 위해 과거를 준비하여 대과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조광조의 문하생이라는 이유로 벼슬살이가 힘들었고, 전라도 남평의 고을 수령으로 외직에 임명되었다.
‘시골 촌구석이지만 인재를 양성해야겠다.’
백인걸은 학교를 세우고 스승을 뽑아서 가르치게 하였고, 스승이 모르면 직접 학생들을 가르치기까지 했다.
고을 백성들의 세금을 가볍게 하고 부역을 고르게 부과했으며, 청탁이 있으면 엄하게 배척하였다. 이러한 사실이 조정에까지 알려지자 특별히 품계가 올라가는 동시에 중앙에서 벼슬을 하게 되었다.
문정왕후의 정치를 비판하다
나이 어린 명종이 즉위하자 어머니인 문정대비(문정왕후)가 수렴첨정을 하였다. 문정대비는 권력을 쥔 뒤 반대파를 제거하는 을사사화를 일으켰다. 동생인 윤원형을 불러 은밀하게 모의한 것이다.
이로 인해 많은 사림들이 숙청을 당하였다. 사간원 헌납(임금의 잘못을 비판할 수 있는 벼슬)으로 있던 백인걸은 참을 수 없었다.
“대비마마께서 내린 밀지는 부당합니다. 국가의 일은 마땅히 광명정대하게 결정되어야 합니다.
조정의 논의 없이 몰래 처리하는 것은 후세에 부끄러운 일이 될 것입니다.”
“네, 이놈! 여기가 어느 안전이라고? 여봐라, 저놈을 하옥시켜라.”
사간원 헌납으로서 본분을 지킨 백인걸은 괘씸죄로 투옥되었다가 벼슬을 잃었다.
파주에서 백헌납이라는 별명을 얻다
백인걸은 지금의 용주서원이 있는 곳으로 낙향하였으나, 문정왕후를 비판하는 벽서(대자보)가 양재역에 붙은 일을 계기로 함경도 안변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5년 동안 유배 생활을 하던 중 사면령이 내려져 다시 파주로 돌아왔다. 파주에 거처하며 약 20년 동안 성리학 공부에 힘쓰며 후학을 양성하였다.
“저분이 대비마마를 비판했던 분일세. 그분 밑에서 공부를 해야겠어.”
“백헌납이라는 별명을 가지신 그분 맞지?”
이때부터 많은 선비들이 백인걸을 흠모하여 ‘백헌납(白獻納)’이라고 불렀다. 살아있는 권력을 거리낌 없이 비판했던 백인걸을 높이려는 것이었다.
나이 70 다시 벼슬, 청빈하게 살다
백인걸은 문정대비가 죽고 윤원형이 몰락하자 다시 벼슬길에 나아갔다. 나이가 70이었다. 그러나 양주목사로 있을 때에는 선정을 베푸니 백성들이 비를 세워서 칭송하였고, 중앙에서는 관리들이 서로 붕당을 만들어 파벌 싸움하는 것을 비판하였다.
관료로서의 능력뿐 아니라 앞날을 내다보는 혜안도 가지고 있어서 외침에 대비하여 군비를 확장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벼슬살이도 청빈하여 녹봉을 받거나 소득이 있으면 친족에게 나누어주거나 공부하는 서원에 보내곤 하였다. 선조는 그를 청백리로 포상하였다.
백인걸은 파주의 성리학 3현이라 불리는 이이, 성혼, 송익필보다 한 세대를 앞서는 인물이면서 그들과 동시대를 살아간 인물이다.
학문과 인품, 관료로서의 업적 등 모든 면에서 그들보다 뒤지지 않는다.
조선 시대 송시열은 백인걸을 두고 조광조의 학문을 이은 인물로 칭송하였다.
그런데도 파주에서는 백인걸에 대 한 연구가 깊지 않다.
정헌호(역사교육 전문가)
#5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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